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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는 인생이 아니라, 가꾸는 인생이 됩시다
종교뉴스 > 상세보기 | 2019-12-04 17:26:07
추천수 7
조회수   41

글쓴이

크리스천투데이

제목

꾸미는 인생이 아니라, 가꾸는 인생이 됩시다
내   용
 외줄타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외줄 위에서 중심을 잃는 순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은 외 줄 위에서 중심을 잡는 훈련입니다. 외줄타기뿐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바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바로 잡혀 있지 않으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요즘은 매스미디어가 발달되어서 언론 기관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모릅니다. 언론 기관이 중심을 잃고 잘못된 보도를 내보내면, 사회 전체가 큰 혼란을 가져 오게 됩니다.

운동 경기를 하는데 있어서 감독이 중심을 잃어버리면, 선수들이 경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을 잃어버리면 한 순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도 중심을 잃어버리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멋이 아니라 맛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캐나다 컨넥서스교회의 캐리 뉴호프(Carey Nieuwhof) 원로목사님은 온라인 매체인 ‘처치 리더스’에 2017년 교회가 주의해야 할 6가지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물론 캐나다 교회의 현실과 한국교회의 현실은 좀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국교회가 지금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할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사라질 것이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6가지 중에 두 번째는, 멋있기만 한 좋은 교회는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멋있기만 한 좋은 교회는 한 마디로 중심을 잃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맛을 내야 하는 교회가 멋만 내는 교회가 되면 사라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국교회 현실을 바라보면서 조금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언제부터인가 맛을 내기보다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더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과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어려운 현실 가운데 놓여 있고,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멋이 아니라 맛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단정지으셨습니다. 곧 너희는 세상의 소금으로 만들어져 가야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세상의 소금이 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으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소금의 맛을 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뿐 아니라 나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맛을 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소금처럼 살아야, 황금처럼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금이 세 개가 있다고 합니다. ‘황금’, ‘소금’, ‘지금’입니다. 그 중에서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지금 어떤 일을 하며’, ‘지금 어떻게 행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결국 나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곧 ‘지금’ 이 순간을 '소금'처럼 살아야, ‘황금’처럼 귀하고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

소금을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면, 소금은 귀한 본질을 가지고 귀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합니다.

첫째, 소금에는 대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수박이나 설탕이나 단팥죽에 약간의 소금을 넣으면 더 달아지는데, 이것이 대비 효과라는 것입니다.

둘째. 소금에는 억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초밥이나 초무침에 약간의 소금을 넣으면 신맛이 덜하게 되는데 이것이 억제 효과라는 것입니다.

셋째, 소금에는 응고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장어나 생선을 구울 때 소금을 치면 고기가 탱탱해지고 육질이 쫀득쫀득해 지는데, 이것이 응고 효과라는 것입니다.

넷째, 소금에는 방부 효과가 있습니다. 음식은 어디에 두어도 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을 치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늦추게 되는데, 이것이 방부 효과입니다.

다섯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맛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음식은 간이 맞아야 맛이 있습니다. 소금이 너무 많으면 짜고 너무 모자라면 싱겁게 됩니다. 적당량의 소금이 들어가야 음식이 제 맛이 납니다.

소금의 여러 가지 본질 중에서 특별히 주님께서 맛에 대한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은, 소금의 본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맛을 내는 것이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이 소금에 대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맛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멋이 아니라 맛을 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왜 우리는 멋이 아니라 맛을 내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맛과 멋은 비슷한 것 같지만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원적(語源的)으로 볼 때, ‘멋’이 ‘맛’에서 연유했다고 보는 것은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원적으로 그럴지 몰라도, 맛과 멋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맛이 속이라면, 멋은 겉입니다. 맛이 내면이라면, 멋은 외면입니다. 맛은 진실이라면, 멋은 포장입니다. 맛은 숙성반이고, 멋은 속성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맛을 내는 삶보다, 멋을 내는 삶을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맛을 내는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멋을 내는 데는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맛은 숙성에서부터 나옵니다. 곧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멋은 잘 꾸미기만 하면 됩니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맛을 내기 보다는 멋을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맛과 멋의 승부에서는 맛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도, 같이 지내보면 그 사람이 맛을 내는 사람인지 멋을 내는 사람인지 다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멋을 내는 사람은 한두 번 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이 알아차립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버려지게 된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시면서, 그 뒤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마 5:13)”.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가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아무리 멋을 부려도,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닌 것입니다. 소금이 소금 될 수 있는 것은 맛입니다. 맛 잃은 소금은 아무 쓸모없이 바깥에 버리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식당은 결국 맛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대구 수성구에 들안길이라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얼마나 다양한 식당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수많은 식당들이 즐비하지만, 계속 대를 이어 장사하는 집이 있는가 하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는 음식점들도 많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맛입니다. 맛있는 집은 계속 장사가 잘 되지만, 맛이 뒷받침 안 되는 집은 문을 닫게 되어 있습니다.

음식집은 맛으로 승부하는 곳이지, 멋으로 승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전국에 이름난 맛집을 보면, 멋에 많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멋진 인테리어와 멋진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맛만 있으면 그 집은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제가 멋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멋과 맛이 어우러지면 더욱 좋은 것이 사실입니다.

명품을 걸친다고 명품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명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 명품은 그 값어치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명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비자들을 통해 값어치가 증명되었고, 명품의 역사가 또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는 명품에 대한 가치 때문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명품 가방을 들고 명품 옷을 입으면 내가 명품 인생인 것처럼 생각이 들어서 명품을 구입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품 가방을 들고 명품 옷을 입는다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명품 인생’이라고 인정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명품을 부러워하지 말고 명품 인생이 되라

군인들이 휴가를 나올 때 입는 옷은 부대 안에서 입는 옷과 다릅니다. 휴가 나올 때 입는 옷은 아껴두었다가 휴가 나올 때만 입습니다.

그리고 휴가 나올 때 입는 옷은 휴가 나오기 전에 군대 말로 ‘각’을 잡습니다. 줄이 선명하게 새겨지게끔, 바지에도 윗옷에도 겉에 입는 야상에까지 각을 잡습니다. 심지어 풀을 먹여서 각을 잡을 때도 있습니다. 같은 군인들끼리는 각을 잘 잡은 것을 보면 때로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군인들이 군복에 ‘각’을 잡는 이유는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입니까? 민간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군대에서 군인 외 사람들을 민간인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민간인들은 군인들이 ‘각’을 잡았는지조차 모릅니다. 다 같은 군복이고, 그 군복을 멋있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군인들은 민간들이 ‘각’을 잡고 나가면 나를 멋있는 군인으로 봐줄 것이라는 기대로 그렇게 힘든 일을 합니다.

명품을 부러워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내 삶이 명품 되어야 합니다. 당당하고 멋있고 매력 있는 이 시대의 명품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명품 인생을 살면, 비록 시장표 가방을 메고 시장표 옷을 입어도 명품으로 보입니다. ‘메이드 인 차이나’를 입어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명품을 사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명품 인생을 살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 되신 장영희 교수님이 쓰신 ‘내가 살아 보니까’라는 글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란 것이다.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꾸미는 인생이 아니라, 가꾸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겉으로 폼 잡는 인생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를 원하십니다. 멋을 내는 인생이 아니라, 맛을 내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맛을 내는 삶이었다

예수님은 멋을 내는 삶이 아니라, 맛을 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오실 때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말 밥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나사렛 촌에서 시골 청년으로 성장하셨습니다.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도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 중심이 아니라, 주로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 출신이었고,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도 멋진 백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에게 온갖 희롱을 당하시고 침 뱉음까지 당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도 발가벗긴 채 달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삶은 멋을 내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맛이 나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 밥통에 태어나셨을 때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을 때도,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을 당하셨을 때도 발가벗기 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떤 멋을 부리지 않아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맛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에, 예수님은 우리 또한 멋 부리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맛을 내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맛을 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맛을 내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첫째, 예수님의 맛을 내야 합니다. 곧 우리 삶 가운데 예수님의 맛이 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맛을 낸다는 것은,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맛을 내며 살아야 합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땅 교회들이 하나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의 교회들의 모습 속에 예수님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데, 그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을 제대로 해야 한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생활이 아닌, 결혼식 때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면 함께 살고 싶어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신랑 신부는 기대와 설레임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이 되면, 두 주인공은 모든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결혼합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해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출발입니다. 결혼식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부부로써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식을 올릴 때,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의 감사와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과 결혼식을 올렸다면, 신랑 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만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결혼식의 향수에 취해 있고,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예수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이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결혼식을 올린 우리는 결혼생활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맛을 내야 합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바울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삶의 이유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다움의 맛을 내야 한다

둘째, 자기다움의 맛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담 이래 지금 까지 이 땅 가운데 태어나서 죽은 사람들과 지금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제껏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쌍둥이가 똑같은 것 같아 보이지만, 쌍둥이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독특한 걸작품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걸작품이야’ 라고 자기만의 렌즈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끼워준 렌즈를 통해 세상의 가치를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절하(平價切下)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렌즈들은 잘못된 렌즈이기에, 벗어 던져야 합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는 분은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아닙니다. 가장 친한 친구도 아닙니다. 나 자신도 아닙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렌즈를 가지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우리를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시 않으십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독특한 걸작품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신 달란트대로 자기다움의 맛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모델이 필요하지만 모델과 똑같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본받고 싶은 모델이 필요합니다. 분명히 그 모델의 좋은 점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똑같이 되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과 똑같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 가운데 주신 은사대로 나답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보면 ‘한 배에서 나왔는데 어찌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싫으신가요? 다 똑같기를 원하시는가요? 그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그 모습 그대로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결이 있다

히말라야 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라다크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호랑이의 무늬는 밖에 있고 사람의 무늬는 안에 있다.”

라다크 사람들은 호랑이의 무늬를 보면서 자신들 안에도 ‘무늬’가 있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통찰력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고유의 무늬가 있습니다. 그 무늬는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어령 박사님은 ‘무늬’ 대신 ‘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어령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결’이라는 접미어는 보통명사에 붙어 특수한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인데, 인체에도 물건에도 많이 붙게 된다. 살에 결을 붙이면 ‘살결’이 되고 마음에 결을 붙이면 ‘마음결’이 된다. 숨 쉬는 숨에 결을 붙이면 ‘숨결’이 되고 물에 결을 붙이면 ‘물결’이 된다.

물건이나 생명 그리고 마음과 생각에 존재하는 일정한 흐름과 고유한 무늬, 일관된 질서와 특성이 바로 결이다. 모든 개체에는 그 결이 있고, 결을 지니고 있는 것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이라 해도 이 지구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존재 가치를 갖는다. 이 결이 있어야 사람들은 그야말로 ‘한결같은’ 자신의 삶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결이 있습니다. 그 결이 바로 나다움입니다. 그 결을 우리가 발견하고 그 결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잘 사는 것은 나답게 사는 것이다

흔히 인생의 선배들이 인생을 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인생을 잘 사는 것은 다름 아닌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재영답게 살 것입니다. 다른 어떤 목사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재영 목사답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답게 사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맛을 잃어버리고 멋을 부리며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 소금의 맛을 내면서 살라고 하시는 것이지 맛을 잃어버린 채 멋을 내며 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맛을 내며 살아야 합니다. 나다움의 맛을 내며 살아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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